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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ns, Debt, Algorithms

쇠사슬, 부채, 알고리즘

오늘 글은 좀 어렵고, 무겁고, 복잡하다. 그런데 꼭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다. I. 자유를 선물 받은 사람들 1865년 1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3조가 비준되었다.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역사책은 이 순간을 위대한 진보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서사는 거기서 멈춘다.

EC
Ethan Cho
Chief Investment Officer, TheVentures
1,406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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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은 좀 어렵고, 무겁고, 복잡하다.

그런데 꼭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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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자유를 선물 받은 사람들

1865년 1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3조가 비준되었다.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역사책은 이 순간을 위대한 진보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서사는 거기서 멈춘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

해방 직후 벌어진 일을 직시해야 한다. 400만 명이 하루아침에 “자유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토지가 없었다. 자본이 없었다. 문해력이 없었다. 사회적 네트워크가 없었다. 심지어 이들 대다수는 태어난 곳 이외의 지리를 알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주어진 “자유”란 무엇이었나.

답은 간단하다. 껍데기였다.

해방된 노예 대다수는 같은 농장에서 소작농(sharecropper)이 되었다. 더 이상 주인의 “재산”은 아니었지만, 주인의 땅에서, 주인의 종자를 빌려, 주인의 가격에 면화를 팔았다. 법적 신분은 바뀌었으나 경제적 종속 구조는 그대로였다. 쇠사슬이 사라진 자리에 부채(debt)가 들어앉았다. 채찍 대신 신용 시스템(credit system)이 사람을 묶었다.

이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첫 번째 교훈이다.

**지배 시스템은 죽지 않는다. 업그레이드된다.**

그리고 업그레이드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유를 부여한다”는 서사를 입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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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해방선언의 숨겨진 경제학

링컨을 도덕적 영웅으로만 읽는 것은 역사를 절반만 읽는 것이다.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 1863)의 맥락을 보라. 이 선언은 남북전쟁 와중에 발표되었다. 적용 범위는 “반란 중인 남부 주”에 국한되었다. 북부의 노예주(경계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군사 전략이자 외교 전략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를 승인하지 못하도록 도덕적 명분을 선점하는 한편, 남부 경제의 근간인 노예 노동력을 와해시키려는 전쟁 수단이었다.

이 사실이 링컨의 업적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를 분명히 한다. “자유”의 부여에는 항상 부여하는 쪽의 경제적 계산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부 산업자본에게 노예 해방은 도덕적 사업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재편이었다. 남부의 봉건적 농업 경제를 해체하고, 400만 명의 새로운 임금 노동자를 산업 경제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소유된 노동자”보다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다. 임금을 주되, 주거와 의료와 노후의 비용은 노동자 본인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은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비용 구조의 최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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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2025년의 해방선언

이제 160년을 건너뛰자.

2024-2025년, 전 세계 기술 산업이 하나의 서사에 수렴하고 있다. “AI가 인간을 반복 노동에서 해방시킨다.” 이것이 OpenAI의 서사이고, Google의 서사이고, Microsoft의 서사이다. 모든 AI 컨퍼런스의 키노트가 이 문장의 변주다.

이 서사의 구조를 링컨의 해방선언과 나란히 놓으면, 불편할 정도로 대칭적이다.

1865년: “더 이상 다른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유롭게 일하고 살 수 있다.”

2025년: “더 이상 반복 업무의 노예가 아니다.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두 선언 모두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두 선언 모두 선언의 주체가 피선언자(해방되는 자)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노예는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무직 노동자도 스스로 AI 전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해방은 위에서 내려온다. 항상.

그리고 두 선언 모두, 선언의 이면에 선언자의 경제적 이해가 정확하게 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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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새로운 소작제의 아키텍처

해방된 노예가 소작농이 되었듯, “AI로 해방된” 노동자는 어디로 가는가.

냉정하게 보자.

AI가 중간 숙련 업무(mid-skill tasks)를 대체하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두 가지 경로가 열린다.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가거나. “AI를 활용해 더 창의적인 일을 하라”는 것이 공식 서사다. 현실에서는 다수가 아래로 내려간다. 더 불안정한 긱 이코노미(gig economy)로, 더 파편화된 계약 노동으로.

그런데 여기서 구조를 자세히 봐야 한다.

AI 시대의 생산수단은 무엇인가. 데이터, 컴퓨팅 파워, 모델이다. 이 세 가지를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Nvidia가 GPU를 만들고, Microsoft/Google/Amazon이 클라우드를 운영하며, OpenAI/Anthropic/Google이 모델을 훈련시킨다. 개인 노동자는 이 인프라 위에서 월 $20의 구독료를 내고 “자유롭게” 일한다.

이 구조는 소작제(sharecropping)의 디지털 버전이 아닌가.

소작농은 지주의 땅에서, 지주의 종자로, 지주의 가격에 면화를 팔았다. 오늘의 지식 노동자는 빅테크의 클라우드에서, 빅테크의 모델로, 빅테크의 플랫폼 위에서 결과물을 생산한다. 토지 소유가 농업 경제의 권력이었듯, 인프라 소유가 AI 경제의 권력이다. 그리고 그 인프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소작농에게 “너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한 것과, 월 $20 구독자에게 “AI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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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자유의 세 개의 층위

여기서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해부해야 한다. 자유에는 최소 세 개의 층위가 있다.

첫째, 형식적 자유(Formal Freedom). 법적 신분의 변경. 노예가 아닌 자유인. 누구나 AI 도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선언. 이것은 자유의 가장 얕은 층이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형식적 자유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가 반복적으로 증명한 사실이다.

둘째, 실질적 자유(Substantive Freedom). 경제적 자립, 교육, 사회적 이동성. 토지도 자본도 문해력도 없이 풀려난 노예에게 형식적 자유는 공허했다. 마찬가지로, AI 리터러시도, 데이터도, 컴퓨팅 자원도, 영어 능력도 없는 개인이나 국가에게 “AI 민주화”는 실리콘밸리의 마케팅 용어일 뿐이다. 실질적 자유는 자원의 재분배 없이는 달성되지 않으며, 자원의 재분배는 기존 권력 구조의 저항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셋째, 서사적 자유(Narrative Freedom). 이것이 가장 깊은 층이며, 가장 간과되는 층이다. 누가 “자유”를 정의하느냐의 문제다. “자유란 이것이다”라고 규정하는 자가 프레임을 장악하고, 프레임을 장악한 자가 실질적 권력을 행사한다.

링컨 시대에는 북부 산업자본이 “자유로운 노동”의 프레임을 설정했다. 자유로운 노동이란 곧 임금 노동이며, 임금 노동이야말로 문명적이라는 프레임. 이 프레임 안에서 해방된 노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로운” 선택은 공장에 취직하거나 소작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오늘은 빅테크가 “자유”의 프레임을 설정한다. 자유란 반복 업무로부터의 해방이며, AI 도구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적이라는 프레임. 이 프레임 안에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로운” 선택은 AI를 수용하고 적응하는 것이다. 거부는 퇴행이고, 저항은 러다이트(Luddite)다.

자유의 정의를 독점하는 것. 이것이 가장 세련된 형태의 지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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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소주의의 함정, 그리고 그 너머

여기까지 읽으면 자연스러운 결론은 비관이다. “자유는 착각이다. 시스템은 영원히 재생산된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이 결론은 지적으로 매력적이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틀렸다.

첫째, 역사적으로 틀렸다. 노예해방이 형식적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형식적 자유가 없었다면 민권운동 자체가 법적 근거를 갖지 못했다. 인쇄기도, 인터넷도 처음엔 권력의 도구였지만, 결국 기존 구조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 전환기의 고통과 비대칭은 실재하지만, 그것이 영구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둘째,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투쟁만으로 자유를 설명하는 프레임 자체가 불완전하다. 냉소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전제 자체가 틀렸다면? 자유가 애초에 인간의 힘으로 “쟁취”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이 글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자유는 항상 조건부라는 사실이다. 링컨의 해방에는 북부 산업자본의 이해가 내장되어 있었다. 빅테크의 “AI 해방”에는 구독 경제와 인프라 종속이 내장되어 있다. 인간이 설계하는 자유에는 반드시 설계자의 이익이 들어간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이지, 자유의 한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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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전환기의 경제학: 가치는 어디로 이동하는가

자유가 실체든 착각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자유”의 서사가 발생하는 곳에 항상 거대한 가치 이전(value transfer)이 일어난다.

노예 해방 이후 미국 경제의 무게중심은 남부 농업에서 북부 산업으로 이동했다. 면화 경제는 쇠퇴했고, 철강과 철도와 석유의 경제가 부상했다. 이 전환에서 부를 축적한 것은 해방된 노예가 아니라, 전환의 인프라를 소유한 카네기, 록펠러, 밴더빌트 같은 산업 자본가들이었다.

AI 시대의 가치 이전도 같은 패턴을 따를 것이다. 전통적 노동 집약 산업에서 AI-네이티브 산업으로 가치가 대규모 이동할 것이며, 이 전환의 최대 수혜자는 “해방된” 노동자가 아니라 전환의 인프라를 소유한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보여준다. 인프라 소유자가 영원히 독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철도 재벌은 결국 반독점법의 대상이 되었다.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은 해체되었다. AT&T는 분할되었다. 권력의 집중은 그에 대한 반작용을 필연적으로 낳는다. 다만, 그 반작용이 오기까지의 시간이 한 세대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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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진짜 질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자유는 사실인가, 실체인가, 아니면 개념이고 착각인가.

이 글이 추적해온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자유”의 역사다. 그리고 그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이 만든 자유는 항상 조건부이고, 항상 설계자의 비즈니스 모델이 내장되어 있으며, 항상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수반한다. 쇠사슬이 부채로, 부채가 알고리즘으로 바뀔 뿐이다.

그렇다면 무조건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만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아, 또 교회 얘기네” 하고 떠나려는 분들에게.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생각해보시라. 이 글이 7개 섹션에 걸쳐 증명한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자유는 전부 사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론 앞에서 “그래도 인간이 답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근거 없는 믿음 아닌가.

이것은 종교적 수사가 아니다. 이 글의 논리적 귀결이다.

인간이 설계한 모든 “자유”에 조건이 붙어 있다면, 무조건적 자유는 인간의 설계 바깥에서 올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든, 초월이라고 부르든,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인식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첫째, 세상이 파는 “자유”에 속지 않을 수 있다. 진짜 자유를 아는 사람은 가짜 자유의 마케팅을 꿰뚫어 본다. 노예해방선언의 이면도, “AI가 당신을 해방시킨다”는 서사의 이면도.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진리가 거짓된 자유의 서사로부터도 자유롭게 한다는 뜻이다.

둘째, 그 자유를 받은 자에게는 책임(stewardship)이 있다. 은혜로 자유를 받았다면, 그 자유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환기의 소작농이 되어가는 사람들, AI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들, 새로운 형태의 종속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위해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투자자로서 20년간 기술과 자본의 교차점을 관찰하며 내가 배운 것은, 시장은 결국 가치가 있는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정의하는 “가치”와 인간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간극 속에서 행동하는 것.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투자 철학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쇠사슬이 끊어졌다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쇠사슬이 있던 자리에 무엇을 놓느냐가 자유를 결정한다. 1865년에는 부채가 놓였다. 2025년에는 알고리즘이 놓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놓여야 할 것은, 처음부터 다른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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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an Cho는 TheVentures의 CIO로, 기술과 자본이 만드는 권력 구조의 교차점을 20년간 관찰해왔다. 이 글은 투자 조언이 아니라,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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